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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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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책 일부 내용입니다.

흥정당 동남쪽 동궁이 머무는 전각을 다들 도깨비 전각이라 불렀다. 밤마다 수상한 그림자가 일렁이거나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둥, 괴이한 사건이 자주 벌어진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한데 요새는 그 의미가 다소 변질되었다.

전혀 다른 이유로 도깨비 전각이라 불린다. 바로 무섭기로 소문난 동궁 때문이다. 동궁은 환관과 궁녀라면 학을 뗐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근처에 오지 못하게 내쳤다. 글을 읽을 땐 부정 탄다며 열 보 밖으로 물리기까지 했다.

 

굳이 따지자면 궁녀에게 더 박했다. 환관은 양물을 거두기는 했으되 그래도 사내라 신의 있는 자도 간혹 있다지만, 궁녀는 시답잖은 수작만 부린다며 일갈했다. 특히 궁인이 제 분수를 지나치는 걸 못 견뎌 했다. 아무리 싹싹한 아이라도 친한 척 너스레를 떨었다간 종아리가 터지도록 회초리를 맞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도깨비 납신다며 기피하기 시작한 전각 일대는 금세 황량해졌다. 을씨년스러운 동궁 전각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은 단연코 덕임이 일하는 별간이었다. 주합루宙合樓를 떠받치는 기둥 아래 찬밥데기처럼 붙박인 그곳은 말이 좋아서 별간이지, 잡동사니를 죄다 처박아놓는 헛간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공들여 정돈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누군가 버려두고 도망간 쓰레기가 가득 쌓여 말짱 도루묵인 곳에서, 덕임은 벌써 십수 년을 지냈다.

지밀 궁녀인 것이 화근이었다. 궁녀들끼린 원래 텃세가 심한 법이라지만 지밀은 특히 그렇다. 지밀나인들은 덕임을 번살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나도 얼마 안 있으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된다고 치맛자락에 매달려 보았지만 별간에서 더 배우고 오라는 핀잔만 들었다. 걸레질을 하거나 하루 종일 멀뚱히 앉아 있어야 하는 별간에서 뭘 배워야 하는지는 물론 알려주지 않았다. 항아님들이 신참을 배척하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간에서 망상하는 것처럼 승은을 두고 경쟁하는 건 아니다. 궁녀치고 팔자 고치는 단꿈을 꿔보지 않는 자는 없다지만, 그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얼뜨기 또한 없으니 말이다. 더욱이 늙은 상궁부터 파릇파릇한 나인까지 죄다 '도깨비 동궁마마'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마당이니 실로 가당찮은 소리다.

다만 지밀나인들은 지체 높은 웃전의 시중을 드는 만큼 덩달아 신분 의식이 강하다. 지밀부 외의 궁녀들은 무수리나 다름없다며 깔보기는 물론, 더럽고 힘든 일은 기피했다. 하여 시궁창 같은 별간은 당연히 하찮은 생각시의 차지였다. 오늘도 덕임은 빗장을 열기도 전에 문간 가득 쌓인 쓰레기 더미부터 발견했다. "뭐야, 또 누가 이랬어!" 덕임은 가장 가까이 있는 무더기를 걷어찼다. 숨어 있던 쥐새끼가 튀어나와 찍찍댔다. 둔탁하게 삐걱대는 문을 어깨로 밀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창부터 열었다. 화창한 햇살이 들자 휘날리는 먼지가 고스란히 보였다.

 

빗자루로 쥐를 쫓아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닦는답시고 걸레를 놀릴 때마다 풀썩 쏟아지는 먼지 때문에 기침을 연거푸 했다. 겉장이 먹물로 얼룩진 책을 치우다가 손을 베기도 했다. 청소를 끝낸 다음에는 한결 여유로워졌다. 아니, 할 일이 아예 없었다. 멍하니 딴생각을 하던 덕임은 문득 습관처럼 창 너머 높이 솟은 해를 보더니, 어슬렁어슬렁 볕이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주합루 아래층, 즉 별간과 맞붙은 옆 전각에서 사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이 아닌 것은 없다 하나, 길흉과 화복이 하나같이 하늘이 명한 바인데 어찌 정과 부정의 분별을 두겠는지요?" "하늘의 명은 사람이 다룰 것이 아니지만, 암장이나 질곡은 도를 닦음으로써 사람이 능히 피할 수 있소. 그러므로 군자의 도리는 스스로 있는 도를 닦고 순리를 따라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오." "하면 주자 왈 하늘에 있어서는 모두가 정명이지만 사람이 따지자면 정명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정명과 정명이 아닌 것이란 도를 극진히 함과 극진히 아니함의 구분이며..."

매일 이 시각이면 동궁과 시강원들이 담론을 나누는 시강이 열리는데, 별간에까지 그 소리가 들린다. 덕임은 창에 더욱 바짝 붙었다. 한손으로는 허름한 문갑을 뒤져 작은 서첩과 붓을 꺼냈다.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는 선비가 득기를 한다는 말을 두고 <집주>에서는 득기는 곧 실기하지 않음이라 하였는데..." 동궁의 대답이 술술 막힘없이 이어졌다.

도둑 글 공부를 한 지 어언 삼 년째라, 덕임도 풍월을 읊을 기세였다.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서첩을 대고 동궁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책벌레인 동궁의 성화로 매일 밤낮없이 이어지는 시강을 귀동냥하였으니, 그 목소리만은 백 보 밖에서도 감별할 수 있을 만치 친숙하다. 부드럽게 낮으며 또한 깊은 그것은 소년으로서 변성기를 겪고 금방 청년으로 자라난 완연한 사내의 음성이요, 아직은 덜 여물어 싱그러운 옥음이었다.

 

물론 처음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낡은 벽을 뚫고 들어온 청량한 음성은 종일 듣는 계집애들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어린 환관들의 앵앵대는 목소리와도 천양지차였다. 그것은 살아 숨 쉬고 피가 끓는 사내의 형상이었다. 너무나 빨리 바깥세상과 유리되어 버린 그녀로서는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강인한 남성성, 그 자체였다. 다만 가슴을 떨리게 해봤자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고, 실체 없는 울림에 불과했다. 하루 이틀 계속해서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스스럼없이 받아 적을 만큼 담력도 커졌다. 먹물을 가득 담은 간장 종지에 붓을 찍어가며 열심히 휘둘렀건만, 들려오던 목소리들이 문득 뚝 그쳤다. 오늘은 웬일로 서연을 일찍 파했나 보다. 마냥 아쉬운 채로 덕임은 서첩을 도로 감췄다. 또 할 일이 없다. 도망을 갈래도 만전을 기하려면 오시까지는 버텨야 한다. 밀린 필사 일이라도 할까 고민했으나 내키지 않았다. 골방에 갇혀 글이나 베끼기엔 날씨가 너무 좋다. 빨리 끝내야 한 푼이라도 더 벌겠지만... 덕임은 창 너머로 수다 떠는 내시와 궁녀를 훔쳐보았다. 그때 삐그덕,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도 한참중인데, 위의 내용은 옷소매 붉은 끝동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이후의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한번 옷소매 붉은 끝동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드라마만큼 재밌고, 몰입감도 좋은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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